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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입속 깊은 곳에서
    소설 2020. 9. 6. 00:52

     

     

     

     

     리리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핑크색 전화기가 울리길 바라며 그 앞을 서성였다. 방엔 새끼 손톱만한 연분홍색 꽃들이 빼곡한 벽지가 발라져 있었고 책상과 의자 침대 같은 가구는 화이트 톤으로 맞추어져 있었다. 리리의 발 밑으로는 마른 장미색에 가까운 진분홍 카페트가 깔려있었다. 카페트는 따뜻하고 보송보송한 촉감을 가지고 리리의 밑에서 가만히 있었다. 리리는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돌리기 시작했다. 이 방에 깔린 침묵이 깨지기 위해선 전화가, 누구에게서 걸렸는지도 모르는 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전화는 울리기 시작했다. 핑크색의 전화기는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하려고 하는 듯 몸을 떨지 않고 소리로만 리리를 불렀다.

     그러나 막상, 리리는 전화가 울리기 시작하자 이유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전화를 받으면 이 꿈에서 깨버릴 것 같아. 그래서 그는 전화를 등지고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금색으로 도금된 둥근 문고리를 돌리자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스르륵 문이 열렸고 리리는 동시에 기이한 상황과 마주해야 했다.

     문 앞은 투명한 젤리로 가득했다. 이는 이전에 리리가 본 영상 속 장면과도 비슷했다. 눈이 아주 많이 오는 지역의 영상이었는데, 그 영상에서 펑펑 눈이 내려 문 앞까지 사람 키만큼 쌓여 있었다. 그 영상을 찍은 사람은 영상 속의 리액션을 위해 일주일간 눈을 치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리리가 타국 사람인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말이다. 리리는 그때 그 사람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 영상 끝에 그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119를 부른다고 했던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리리는 그의 당혹스러움을 약간이나마 공감했다. 그것도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분홍빛의 젤리 벽을 보고. 그 영상 속 사람이 마지막에 어떻게 된 지 기억나지 않았다. 계속 그 집에 갇혀 있을까? 이런 막연함 앞에서.

    그래서, 리리는 곧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기 방은 핑크색 벽지가 발라져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혼자 사는 집에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분홍빛 젤리가 집 앞에 쌓여 있을 리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이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함 때문에. 그는 자신이 꿈에서 깨길 기다렸다. 눈을 감고 천천히 숫자를 셌다. 그러나 꿈은 깨지 않았다.

     문을 다시 닫고 그는 책상에 얹어진 자신의 것일지도 모르는 일기장을 구경했다. 분홍색 일기장은 겉표지에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으나 리리는 보자마자 일기장임을 알아차렸다. 그것의 첫 장은 비어 있었다. 첫 장을 넘기고 그다음 장부터 노트를 사용하는 건 확실히 그의 버릇이었다. 그러니 이 일기장도 리리의 것, 이라고 하기에는 떼를 쓰는 것 같지 않을까. 꿈속의 리리와 현실의 리리는 같을 리 없다, 그럼 꿈의 리리는 어디로 갔는지, 그는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워졌다. 그래도 그는 일기를 읽었다.

     일기장은 까만 볼펜으로 쓰여 있었다. 아주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듯 페이지들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리리는 그것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의 글씨와는 전혀 다르게 생겨서 생경했다. 뭐라고 적혔는지 읽을 수 없는 것 또한, 그런 감정에서 왔을지 모른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두 명의 리리는 어떻게든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꿈의 리리와 자신이 다른 존재임을 다짐처럼 되뇌었지만, 그는 이런 자잘한 글씨에서부터 차이를 느끼고 거북했다. 리리는 문득 자신의 글씨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펜이 필요해. 방에는 종이에 쓸 수 있는 도구가 일절 없었다. 책상 서랍과 침대 밑, 옷장을 뒤져봤지만, 얄궂게도 펜은 나오지 않았다. 리리는 이곳의 리리를 의심했다. 일부러 한 게 아닐까 하고. 일부러 나를 잊어버리게 하려는 게 아닌가, 하고. 하지만 그런다고 리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나? 그는 일기장을 덮었다. 한 장 한 장 찢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손가락으로 일기장 맨 앞, 비어 있는 첫 장에 이렇게 적었다. “이건 너무도 지루해.”

     일기장을 덮은 리리는 침대에 누웠다. 폭신해서 그의 몸을 밑으로 잡아끄는 것 같은 침대에서 그는 결코 잠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몸은 그의 생각과 달리 아주 긴 꿈에서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가 울렸다. 처음과 달리 날카로운 소리로 전화는 그를 괴롭혔다. 그는 한참을 뒤척이다 눈을 떴고 눈물을 흘렸다. 분홍색 벽지가 보여서가 아니고, 자신을 끌어당기는 침대에서 눈을 떠서가 아니고, 아직도 책상에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일기장이 놓여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가 막 꿈에서 깼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흘러내렸다.

     수마처럼 막연한, 투명한 분홍빛 젤리 너머로 흐린 도시가 움직이고 있다. 문을 굳게 닫고 리리는 다시 잠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쉬운 일인 동시에 어려운 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하루는 매우 조용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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