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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입속 깊은 곳에서소설 2020. 9. 6. 00:52
리리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핑크색 전화기가 울리길 바라며 그 앞을 서성였다. 방엔 새끼 손톱만한 연분홍색 꽃들이 빼곡한 벽지가 발라져 있었고 책상과 의자 침대 같은 가구는 화이트 톤으로 맞추어져 있었다. 리리의 발 밑으로는 마른 장미색에 가까운 진분홍 카페트가 깔려있었다. 카페트는 따뜻하고 보송보송한 촉감을 가지고 리리의 밑에서 가만히 있었다. 리리는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돌리기 시작했다. 이 방에 깔린 침묵이 깨지기 위해선 전화가, 누구에게서 걸렸는지도 모르는 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전화는 울리기 시작했다. 핑크색의 전화기는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하려고 하는 듯 몸을 떨지 않고 소리로만 리리를 불렀다. 그러나 막상, 리리는 전화가 울리기 시작하자 이유 모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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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한 월요일소설 2020. 7. 31. 18:05
장마가 시작되려는 모양이야. 사과를 깎다 나는 속삭였다. 너는 창문 밖을 보고 있었고, 그것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그런 상태에 가까웠다. 유리창은 잿빛. 투명한 창문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너는 그 너머 무언가 있다는 듯, 하염없이 하염없이 창을 바라봤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 찾아오는데 어떻게 바로 앞의 어둠을 모른 척 할 수 있는지. 나는 잊지 않고 네 옆구리를 찔러준다. 아, 아, 깜짝 놀란 너는 눈을 깜빡인다. 말갛게 고이는 눈물. 눈을 깜빡이는 건 자연스러운 행동일 텐데, 너는 왜 그러지 못하는지. 이런 의문들을 품은 지 오래되었으나 너의 옆구리를 한 번씩 찔러줌으로써 나는 이 기이함에 적응했다. 아직 채 닫지 못한 입에 마른 과육을 넣어준다. 작게 잘라서, 조각들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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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희곡 2020. 5. 4. 02:30
공간: 에메랄드 성*의 창고. 시간: 현대. (도로시와 토토는 각기 청소 중이다. 물건을 옮기고 그 자리를 쓸고 다시 물건을 원래 자리에 두고. 창문이 없어 먼지는 그대로 물건 위로 앉는다. 일은 끝나지 않고 둘은 바쁘게 움직인다.) 도로시: (먼지떨이를 던지고) 토토. 우리 돌아가자. 토토: (한숨) 또? 질릴 때 됐다고 생각했는데…. 도로시: 빈말로 하는 게 아니야. 토토: 그래, 그래. 네가 계속하는 말이잖아. 마치 숨 쉬듯이, 해가 지고 또 해가 뜨듯이. 아니야? 도로시: 난 진지해! 토토: 그렇겠지. 걱정하지 마, 믿어 줄게. 도로시: 정말? 토토: 정말! 그러니까 네 계획부터 한번 말해봐. 도로시: 우선…이 빌어먹을 일을 그만두는 거지. 토토: 그리고? 도로시: 이 망할 도시를 떠나는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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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문희곡 2020. 3. 9. 18:01
시간: 어림짐작 되지 않는 미래. 장소: 황야 한가운데의 대저택이 있다. 인가는 없다. 저택의 방 중 가장 안쪽에 자리한 조용한 방. 여자: 39살 아이: 14살 (방은 작고 조용하다. 오래된 책장이 두 개 벽에 붙어 있다. 책장 때문인지 창문은 보이지 않는다. 벽엔 대신이라 하긴 뭣하지만, 황야 그림이 있다.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다. 발소리. 느리고 조심스럽다.) 아이: 들어오지 마. 여자: (문 열고 들어온다) 아이: 들어오지 말랬잖아! 여자: 조용히 해. 시끄러워. 아이: 내가 왜? 여자: 나도 왜? 내 집인데? 아이: 내가 알 바야? 여자: 그래. 몇 달 동안 우리가 무슨 말을 했니. 아이: 내 말 듣기나 하고? 여자: 너 하기 달렸지. 아이: 너 하기 달렸지. 여자: 귀염성 없기는. 아이: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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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부재소설 2020. 2. 7. 19:07
오랜만의 편지입니다. 편지지를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대형 서점의 스토어와 마트를 서성였어요. 이미 썼던 편지지는 쓰고 싶지 않았거든요. 제 책상엔 남은 편지지가 가득해졌지만, 당신 말고 편지를 보낼 사람은 더 없습니다. 애초에 편지라고 하는 것이 요새 드물어지지 않았나요? 달짝지근하게 쓴 연애편지 말고 말을 하기 위한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종이에 꾹꾹 눌러 쓰는 일은 공부할 때 말곤 어색하기까지 합니다. 지금도 이상한 느낌을 받아요. 누군가에게 할 말이 많지도 않은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쓴다는 것 자체가. 갑자기 저번 수업에 같이 조별 활동을 하게 된 사람이 저에게 한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아씨, 뭐 이런 애가. 딱 봐도, ‘난 지금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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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외 1편시 2020. 2. 1. 23:09
Hello 우리는 덜 익은 아보카도처럼 칼로 누르면 더 단단해진다 비닐 속에서 옹기종기 숨을 나눠 마시다 보면 희박해지는 웃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한글로 된 편지를 보낸다 삶을 모험이라 부르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가만, 손을 마주 흔들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평평한 무덤에선 조용히 하기 어려워 데구르르 굴러떨어지는 침묵 ‘견딘다’라 쓰고 나를 누르는 압력의 행방을 의심할 때 차라리 누군가에게 나를 삼켜줘 말하고 싶지만 너는 배가 부르고 나도 배가 불러서 말문이 막힌다 뒤늦게 홀로그램인 줄 눈치챈 세계에서 안녕? 인사를 하자 순식간에 익어버리는 아보카도들 영희 귀를 두 개 가진 빨간 하트 찢고 태어났지. 울음을 터트릴 때마다 확장되는 세계. 부모님은 사랑스런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차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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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설 2020. 2. 1. 22:55
준은 결국 집을 정리하기 위해 돌아왔다. 부동산에 모든 일을 맡기고 싶었지만 어느 날 문득 걸려온 전화에 이 소소한 바람은 무산됐다. 그 집은 껄끄럽다는 답변. 쯧, 하고 혀 차며 말하는 노인에 준은 언짢아 질 뻔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타지에서 금방 온 사람 이외에 그 집에 누가 들어올까. 여기까지 오는 데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오는 길에 희가 언제 도착하냐고 자꾸 물어왔다. 서른 번 넘게 그 소리를 해댔다. 준은 대충 다 와 간다는 말을 또 해줬다. 지금 집에서 그곳까지 가본 적이 없어 준도 잘 알 수 없었으므로. 준은 명백히 질리고 있었다. 지루함, 준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희는 참을성이 없었고 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준은 희가 왜 따라온지 이해할 수 없었다.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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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의 기도는 나날이소설 2020. 1. 7. 21:52
† 길거리에서 희연은 돌연 멈춰 섰다. 탁자 위에 때 지난 크리스마스 느낌의 스노우볼 때문이었다. 하늘하늘 흰 가루가 떨어지기만 하는 스노우볼이 아닌, 오르골도 겸하는 것 같이 보였다. 작은 스노우볼 치곤 꽤 큰 소리가 나고 있었지만 무슨 노래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희연은 자신이 평소에 노래를 잘 듣지 않아 그런 것을 알았고 그게 못내 아쉬웠다. P처럼 노래를 듣는 게 취미였다면 제목을 알 수 있었을까. 그렇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쉬움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늘 그렇듯 P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P는 희연 안에서 죽은 사람. 그러나 좀비와 드라큘라처럼 살아나기도 했다. 햇빛을 보며 산책을 해도, 마늘이 많이 들어간 오일 파스타를 해 먹어도 그는 쉽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동안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