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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이야기소설 2019. 11. 4. 22:20
1. 장작불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있었지 눈의 여왕은 꽃을 좋아한단다. 그녀에게 잡힐 때 꽃 한 송이가 있다면 도망칠 수 있지. 마른 꽃도 상관없다. 네가 찬 작은 주머니에도 마른 풀꽃이 들었지. 하얀 풀꽃은 여왕이 가장 선호하는 꽃은 아니지만, 잠깐 눈을 돌리게 할 수 있단다. 그녀가 꽃을 좋아하는 게 우습니? 꽃은 연약하지 않단다. 꺾을 수 있다고 연약한 것은 없어. 그 안에 하나의 곧은 신념이 깃들면 말야. 물론 그렇다고 그녀는가 꽃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 그녀는 꽃에 묻어난 다른 이의 향기를 느끼는 거란다. 그녀가 만든 모든 걸 녹이고 땅을 지배하는 생명의 요정을. 타샤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이야기에 집중하려 했다. 눈의 여왕의 이야기는 타샤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늘 잠에 이기지 못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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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의 언어소설 2019. 10. 7. 01:13
코코의 머릿결을 만지며 생각했다. 코코는 어디서 왔을까. 코코의 머릿결은 거칠며 푸석푸석하다. 머리카락의 자갈색은 눈동자 색과도 같다. 코코의 눈동자는 까만 눈동자처럼 깊지 않았고 반대로 붕 떠 있어. 코코의 눈을 보면 내가 풍선처럼 공중에 몸이 뜨는 느낌이 난다. 그것은 코코의 존재감과 닮았다. 코코의 눈에는 내가 이따금 비치기도 하는데, 그건 나의 존재감일까. 코코의 눈동자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 코코의 눈에는 쉽게 빗자루에 쓸려버리는 가을이 있다. 코코는 어디서 왔을까. 코코를 처음 본 건 저번 달 초. 해마다 길어지는 여름이 한창이었다. 코코는 내가 잘 다니는 공원 벤치에 누워 있었다. 그곳은 사람이 드물어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그곳 벤치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본 건 처음이라서, 아니 새벽의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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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젤리에 대한 고찰 1생각 2019. 8. 30. 00:03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우울에 대해 서술한 글을 본 적 있다. 비슷하면서도 각자 다른 표현을 쓴 게 기억에 남는다. 표현 자체는 기억에 남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우울과는 또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력이 안 좋은 것은 예전부터 그랬다. 일상생활에 필요가 없으면 가까운 친구의 이름도 까먹는다. 단어들을 잊는 횟수도 많아졌다. 시든 소설이든 같은 단어로 연이어 같은 문장을 적어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잊어버리는 주기는 예전보단 더 짧은 것 같으나 확신은 없었다. 이마저도 잊기 때문이다. 주의력이 약하다. 수업이 끝난 뒤 짧게 한 공지부터 친구와 얘기 도중의 이야기까지 듣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떠올려보려 애써도, 새하얗게 비어있는 기억의 틈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집중력이 약하다. 집중을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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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름생각 2019. 8. 24. 02:06
이슬이 붙어 있지 않아도 풀잎이 반짝인다. 잎사귀들의 초록, 물거품 이는 바다의 파랑, 체리가 익어가는 빨강, 여름의 색들은 강렬하지만 서로를 해치지 않고 한 계절 안에서 어울린다. 말없이 엉겨 붙은 연인의 다리처럼, 또 여름이 왔다. 이를테면, 의문. 매해 지나가는 계절 중 가장 힘든 시간. 내게 너무 더운 온도와 지나친 습도는 고통이었다. 한시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이 계절의 초입에 너가 왔었다. 정확히는 내가 너를 자각한 것, 그게 맞는 말일 거다. 너는 이미 내 근처에 있었고 나도 이미 네 근처에 있었지만 우린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너와 내가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술이 없으면 이 세상에 절반의 연인이 없을 거란 소리를 너를 만난 후에 들었고 나는 거기에 가만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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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생각 2019. 8. 18. 00:57
예를 들어보자. 네 손목에 내가 팔찌를 채워준다. 너는 단 한 번도 팔찌를 해본 적이 없고 이 팔찌는 네게 첫 팔찌인 셈이다. 재질은 어느 게 좋을까? 물에서도 찰 수 있는, 네 이니셜이 새겨진 체인 팔찌라 하자. 너는 선물 받았기에 최대한 오래 끼려 한다. 세수를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친구와 술자리에서 건배할 때도, 글을 쓰거나 과제를 하기 위해 노트북을 쓸 때도, 너는 팔찌와 함께 한다. 그렇지만, 모든 건 끝이 있곤 하니까 나와 더이상 만나지 않게 되면서 내가 준 팔찌도 풀 때가 온다. 그리고 팔찌가 어디로 갔는지 너는 곧 잊을 것이다. 팔찌와 팔찌를 준 나는 사라졌는데 너는 어색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나나 팔찌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너는 어색함을 버릴 수가 없다. 팔찌만큼의 무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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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의 마음생각 2019. 8. 17. 01:30
손톱을 잘라야 한다. 또 하얗게 길어 잘라야만 하는 때가 온 것이다. 내 손톱은 동그랗고 예쁘지 않아 잘 다듬어줘야 한다. 손톱이 길면 몸에 상처를 내기도 하며 손톱이 꺾여 부러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웃기게도 손톱이 너무 짧으면 손가락이 불편함을 호소한다. 노트북 타자를 치면 손끝이 아리기도 하고 일상생활에서 컵을 잡거나 할 때 어색함을 느끼기도 한다. 고작 1~2mm에 불과한데도 손톱을 자르고 나면 그만큼의 틈을 내 삶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자라도 자라도 잘려나갈 운명, 잘라도 잘라도 자라날 운명. 엊그제부터 잘라야지, 마음먹었으나 손톱깎이 근처에 가지도 않았다. 늘 그랬듯 쉽게 귀찮아져서다. 이번엔 다른 느낌도 있었다. 소소한 연민. 키가 크는 것에 있어 우리는 성장했다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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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의 일상생각 2019. 8. 16. 01:30
취미는 자주, 쉽게 바뀌곤 했다. 이번 취미는 그림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엔 소질 있는 편이 아니므로 단지 추상화가 그리고 싶단 이유로 스케치북과 크레용, 색연필과 목탄을 샀다. 원래 하고 싶었던 건 유화를 페인팅 나이프로 거칠게 그리는 추상화를 도전해보고 싶었던 것인데 실천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첫 번째로 가격대가 있었고 두 번째론 내가 그리 오래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한 거에 가깝지 않을까. 재료가 온 날 5편의 그림을 그린 후 근래 들어 손을 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무슨 이유에선가 오늘 스케치북을 펼쳐 전에 그리다 만 ‘강 1’를 그렸고 그에 시들해져 갑자기 다른 것을 그렸다. 체리를 그리고 싶었다. 빨갛다 못해 까맣게 익은 체리. 내가 그린 건 그런 선명한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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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시간생각 2019. 8. 13. 21:55
까만 밤이었나. 새벽의 밤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아서 밝았던 거 같기도 하다. 어스름한 저녁 하늘과 닮아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기억이 맞는지는 이 글을 쓰면서도 의심이 든다. 그때 한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는 일은 기쁨보다 서글픔이 큰 거 같다. 그때, 오월이 오고 있던 날 중 하나, 가로등 하나와 별이 보이지 않던 밝은 하늘과 내 옆의 너, 네가 먹던 컵라면이 있었다. 네가 컵라면을 다 먹길 기다리며 나는 하늘을 보고 있었고 갑자기 울고 싶었다. 우리는 편의점 앞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근처 풀밭엔 풀을 다듬던 할아버지가 계셨다. 분위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는데 나는 울고 싶었다. 그래서 참지 않고 울고 싶다, 소리 내어 말했다. 그러자 너는 조용히 왜, 하고 물었다. 더듬더듬 마음을 가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