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체리의 일상

못 담 2019. 8. 16. 01:30

 

 

 취미는 자주, 쉽게 바뀌곤 했다. 이번 취미는 그림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엔 소질 있는 편이 아니므로 단지 추상화가 그리고 싶단 이유로 스케치북과 크레용, 색연필과 목탄을 샀다. 원래 하고 싶었던 건 유화를 페인팅 나이프로 거칠게 그리는 추상화를 도전해보고 싶었던 것인데 실천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첫 번째로 가격대가 있었고 두 번째론 내가 그리 오래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한 거에 가깝지 않을까. 재료가 온 날 5편의 그림을 그린 후 근래 들어 손을 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무슨 이유에선가 오늘 스케치북을 펼쳐 전에 그리다 만 ‘강 1’를 그렸고 그에 시들해져 갑자기 다른 것을 그렸다.

 체리를 그리고 싶었다. 빨갛다 못해 까맣게 익은 체리. 내가 그린 건 그런 선명한 체리가 아니었지만, 어떤 형태의 체리든 나는 올해 모든 체리에 빠져있었다.

 생각해보니 작년에는 체리를 가지고 시를 쓴 적이 있다. 체리는 심장을 닮은 과일이라 생각했다. 자주 그리고 습관적으로 그리는 앙증맞은 하트모양처럼. 그래서 상대도 없는 예쁜 사랑시를 썼다. 당연히 단지 예쁘기만 한 연시(戀詩)는 시가 되지 못했고 그 당시 나는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시는 결국 파일로 남아 구석에 방치되었고 아직 그것을 다시 쓸 생각은 없다. 그리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뭔지 알게 된 상태에서 체리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예쁜 하트 모양이 사랑의 모습이 아니란 걸, 내가 환상에 빠져있었다는 걸 인정하게 된 것이다.

 오늘 나는 한 지면을 체리로 꽉 채워 그린 결과 체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체리는 혼자를 닮았다. 독자적 개인의 모습. 체리를 먹어보면 알겠지만 체리는 사실 잘 상하고 흉도 잘 지는 과일이다. 대개의 과일이 그렇지만, 과일은 달수록 무르다. 체리 역시 마찬가지로 검을 정도로 붉은 게 흠이 많다. 또 체리 꼭지에 두 개가 붙어 있기도 한데 쌍둥이 같지 않다. 모양이 은근 특이한 것이 많고 맛 또한 같은 나무에서 난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다르다. 닮은 게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체리는 혼자서 살아남은 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리를 닮고 싶다, 짧은 감상이었다. 체리를 닮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좋을까, 고민까지는 하지 못했다. 체리는 이미 완성된 개인이었고 나는 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림 속 체리와 내가 크기를 달리하고 있었다. 지면 위의 엄지손톱만한 체리가 현실의 나보다 크고 무겁다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