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문
시간: 어림짐작 되지 않는 미래.
장소: 황야 한가운데의 대저택이 있다. 인가는 없다. 저택의 방 중 가장 안쪽에 자리한 조용한 방.
여자: 39살
아이: 14살
(방은 작고 조용하다. 오래된 책장이 두 개 벽에 붙어 있다. 책장 때문인지 창문은 보이지 않는다. 벽엔 대신이라 하긴 뭣하지만, 황야 그림이 있다.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다. 발소리. 느리고 조심스럽다.)
아이: 들어오지 마.
여자: (문 열고 들어온다)
아이: 들어오지 말랬잖아!
여자: 조용히 해. 시끄러워.
아이: 내가 왜?
여자: 나도 왜? 내 집인데?
아이: 내가 알 바야?
여자: 그래. 몇 달 동안 우리가 무슨 말을 했니.
아이: 내 말 듣기나 하고?
여자: 너 하기 달렸지.
아이: 너 하기 달렸지.
여자: 귀염성 없기는.
아이: 흥. 성격 나쁘기는.
여자: 뭐?
아이: 그냥 그대로 살아. 영원히.
여자: 안 그래도 그럴까 싶어.
아이: 책이나 읽어줘.
여자: 꼬맹이. (책을 한 권 빼서) 모비딕?
아이: 어제 읽었어.
여자: (다른 한 권을 뽑아) 폭풍의 언덕?
아이: 그것도.
여자: 안 읽은 게 있기나 할까.
아이: 없어. 지루해. 아무것도 없는데 뭘 할 수 있어? 심심해 죽겠어.
여자: 어쩔 수 없지. 적응해.
아이: 누가 이런 생활에 적응해?
여자: 황야에서 앞으로 쭉 살 텐데, 적응해야지.
아이: 싫어.
여자: 네 미래야.
아이: 잡아 왔으면 책임을 져.
여자: 책임? 충분히 지고 있잖니. 더이상 뭘 바라는지 모르겠네. 먹을 것도 주고 옷도 주고 잘 곳도 주고 있잖아. 아, 책도 주구나. (웃음) 그런데, 뭐?
아이: 당연한 거야.
여자: (시선은 먼 곳을 보며) 당연한 건 없지. 그런 건 없어.
아이: 집이었다면…….
여자: 네 어미가 널 맡겼지.
아이: 거짓말.
여자: 믿고 싶은 대로 믿어.
아이: 어른이 되면, 바로 떠날 거야.
여자: 가출이야? 어디로?
아이: 여기만 아니면 돼.
여자: 넌 결국 돌아오게 될걸?
아이: 바다에 갈래.
여자: 거기서 복수라도 시작할 생각이구나.
아이: 아니야.
여자: 맞잖아. 넌 책을 너무 많이 봤어.
아이: 흥. 마음대로 생각해.
여자: 그렇지만, 넌 다시 돌아올 거야. 바다를 볼 수 있든, 없든.
아이: 바다는 있어. 소금기 나는 바람을 맞을 거야. 끼룩거리는 새도 볼 거고. 출렁거리는 물에 잠겨 수영도 할 거야.
여자: 바다는 없어. 넌 수영하지 못할 거야. 밖이 어떤지 알기나 해?
아이: 책은 거짓말하지 않아.
여자: 방에서만 살았으면서 어떻게 알아? 밖에 뭐가 활보하고 다니는지, 얼마나 어두운 세상인지, 네가 알기나 할까.
아이: 내가 뭘 몰라!
여자: 다. 네가 사는 곳은 환상이란다. 안타깝게도. 너는 곧 쫓겨날 거야. 차라리 일찍 집을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어차피 깨질 유리성.
아이: 뭐가 활보하는지 알아.
여자: 모르잖아.
아이: 알아.
여자: 그랬다면, 네 어미가 여기에 널 맞기지 않았겠지.
아이: 아니야. 안다고.
여자: 내가 네 엄마 친구인 건 아니?
아이: 거짓말쟁이! 밖엔 아무도 안 다녀.
여자: 맞아. 흙바람만 불지. 그리고 곧 집 나갈 아이 시체도 뒹굴고.
아이: 저주나 퍼붓는 겁쟁이.
여자: 그래, 맞아. 겁쟁이 꼬마야.
아이: 난 겁쟁이 아냐! 잠깐, 그럼 저 소리도 바람 소리야?
여자: 무슨 소리?
아이: 쉿. 들려?
여자: 아니.
아이: 쿵. 쿵. 쿵.
여자: (고개를 단호하게 젓고) 아니. 안 들려.
아이: 이상하다. 계속 들리는걸. 요새 사람들이 찾아와?
여자: 그럴 리 없어.
아이: 쿵쿵. 거친 노크 소리.
여자: 아니야. 여기까지 오지 않아.
아이: 정말? 아무도 아냐?
여자: 황야엔 아무도 오지 않아.
아이: 나, 당신이 누군지 알 거 같아.
여자: 네가? 나를?
아이: 응.
여자: 내 부모도 나를 몰라.
아이: 자식을 모르는 부모가 어딨어?
여자: 넌 믿니?
아이: 당신, 갱단 두목이지?
여자: (헛웃음) 뭐?
아이: 다 알아. 부하가 오는 거지? 당신이 부하라면 찾아가야지. 편하게 집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가끔 다치고 오는 것도, 성격이 나쁜 것도!
여자: (웃으며) 못 살겠다. 애긴 애구나. 상상력이……. 하여간 독특해.
아이: 아닌 척 하지마!
여자: 그래? 네 앞에서 본색을 보여줘?
아이: (침묵)
여자: 겁먹었니? 안 잡아먹어. 먹을 게 없어도 넌 안 먹어.
아이: 누가 겁먹었다고…!
여자: 글쎄, 누굴까?
아이: 몰라. 빨리 책 줘.
여자: 모비딕?
아이: 그래. (책을 건네받아 보다가) 어디가?
여자: 문 잘 닫혔나 하고. 아직, 밖에서 소리 나?
아이: 칠칠맞아. 어른이면서.
여자: 소리 나냐고 물었어.
아이: ……아니.
여자: 그래. 고마워. 너는 이런 어른 되지 말고.
아이: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여자 문밖으로 나가며 무대 퇴장. 잠시 뒤 여자 비명 들린다. 아이 보던 책을 던지고 문에 가까이 간다. 귀를 대고 소리 듣는데 쿵쾅거리며 조심성 없는 발소리.)
여자: (거칠게 문 열자 아이 부딪히며, 아이: 아야!) 아! 너 왜, 아니, 괜찮아?
아이: 괜찮아 보여?
여자: 그러게 왜 거기 있냐고! 이마가 빨간데…. 한번 보자.
아이: 아파….
여자: 멍이 들겠어. 약 찾아올게.
아이: 무슨 일이야?
여자: 아무 일도 없어.
아이: 비명 들렸어.
여자: (침묵)
아이: 누가 왔어?
여자: 아니.
아이: 부하?
여자: 아니래도.
아이: 드디어 날 어디 팔게?
여자: 애 하나 잡자고? 갱단 두목 체면이 말이 아니네.
아이: 아야야. 나 아파.
여자: 다녀올게. 조용히 방에 있어.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 갈수록 심해진다.)
아이: 누구야?
여자: (침묵)
아이: 약은?
여자: 가야지….
아이: 내가 갈까?
여자: 네가?
아이: 무섭잖아. 손이 떨리는데.
여자: (손을 숨기며) 도움은 안 받아.
아이: 누가 도와준대?
여자: 그냥 넌 좀 조용히 있어. 그리고, 혹시….
아이: 뭐야?
여자: 아니.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정말 누구 부르기 전에.
아이: 아, 알겠어….
(여자, 문밖으로 나가며 무대 퇴장. 아이 침대에 누우며 모비딕 본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조명. 여자는 오지 않고 밖은 조용하다.)
아이: 머리 아픈데. 언제 오는 거야.
(아이가 불을 켜자 방 밝아진다. 조용한 방.)
아이: 거짓말쟁이. 부하 맞으면서. 그래도, 이렇게 안 오는 건 처음인데. 무슨 일일까. (문 앞을 서성이다 문고리 돌리자) 열려? (문에서 떨어지며) 뭘 하려는 거야. 무슨 계획이야. (밖에서 비명 들리고) 믿지 않아. 엄마가, 그 여자 손에 내 손을 건넨 날로부터, 아무도, 아무도 믿지 않아! (밖에서 쿵쿵 소리.) 쉬잇, 조용히 해야지. 숨어야겠어. (침대 밑을 살피며) 여긴 너무 잘 찾을 것 같아. 그렇지만……아무것도 없는걸. 책장과 황야 그림, 침대가 전부. 창문도 없어. 난 잡힐 거야. 그 여자의 부하에게. (황야 그림을 만지다가) 사실 그 여자가 아무것도 아니면 어떡하지? 정말 무슨 일 생긴 거면? (잠시 침묵) 나는 누굴까. 왜 모비딕이 계속 생각날까. (문에 다가가며) 그 여자가 안 오면 어떡하지? 나가면 안 된댔어. 그 여자 말대로 뭐가 있는지도 몰라. 바닷속처럼 깊고 어두운 밤이 다가올 것 같아. 언제 어른이 될까? (문에 다시 다가가서) 나가야 해.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어. 그렇지만…밖에 나가면, 희망이 꺼질 것 같아. 후우, 뱉은 숨에 꺼지는 초처럼 바다가 증발하고. (거칠게 노크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선택이 없네. 그날 엄마도 이랬어? 이건 가출 따위가 아냐. 오해 하지마. 그냥, 떠나는 거지.
(아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비명과 바람 소리 들린다. 조명이 수명을 다한 것처럼 깜빡거리다 이내 꺼진다.)